나는 요즈음 달라져버린 현실에 황당해할 때가 많다. 늘 그렇다고 생각했던 일도 정말 그럴까 하고 회의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나무처럼 성숙한 학생들이 교수님이 지나가는 앞으로 담배 연기를 뿜어낸다든지, 강의실에 휴지를 마구 버린다든지,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행동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주의를 주어야 하나 망설일 때가 있다. 물론 전 같았으면 모든 일 제쳐두고 주의부터 주었을 내가 아닌가. 그런데 요즈음은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결론마저 얻지 못한 채 지나쳐 버리는 수가 많다.

나무에 대해 알기 이전, 그러니까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소나무는 나의 뇌리 속에 파고들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철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에, 나는 애국가를 부르면서 소나무의 기(氣)에 서서히 주눅이 들어갔다. 고개를 넘어 학교를 오가면서 소나무를 보면 우리 아버지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존재로 느껴졌다. 더러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소나무는 을지문덕 장군이나 강감찬 장군처럼 위대해 보였다. 물론 주위의 오리나무나 밤나무 같은 것들은 비교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사철 푸른 그 기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다른 나무들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잎이 다 져버렸는데 혼자서 독야청청하는 모습은 정말 나에게 신앙처럼 위대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고백하면 소나무로 인해 나는 사철수 모두를 역시 대단한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불의에 굽히지 않는 사철 푸른 저 기상을 배워야 한다고 다짐도 여러 번 했다. 활엽수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풍나무의 붉게 타는 정열도 보이지 않았다. 가을이면 산등성이를 기어오르는 단풍의 행렬을 바라보면서도 별로 감흥이 없었다. 겨울 산에서 토끼몰이를 하며 자란 나는 언제나처럼 소나무의 기상에 철저히 세뇌되어 갔다. 그런 생각들은 어른이 된 후에도 내 머리 속에서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절대 변하지 않을 태세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내 머리 속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늘 푸름만을 간직하고 있는 사철수는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제 딴엔 변화가 없음을 자랑할는지 몰라도, 또 한겨울 동안 돋보일지 몰라도 소나무에 대한 나의 인식은 너무 편향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나무들에 대한 지식이 생기기 전에 외곬으로 세뇌되는 것은 편협해지기 쉽고, 오판의 소지가 크다는 생각이다. 또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박탈당하는 결과가 되어 시선의 협소를 빚어낼 수 있다는 조바심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소나무가 사철 푸르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말도 된다. 늘 푸름에 대한 긍지가 있을지 몰라도 주위의 나무들과 어깨를 비비며 사는 슬기가 부족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다른 나무들의 두드러진 좋은 점을 무시하거나 볼 줄 모르는 나르시스한 존재로 전략할 수도 있다.

활엽수는 활엽수대로 가지고 있는 좋은 점이 분명 있다. 봄이 오면 새로움으로 우리 곁을 찾아주고 축 늘어진 어깨를 두드려 기지개를 키며 일어서게 한다. 여름이면 성하(盛夏)의 넉넉함을 보여주고, 베풀며 사는 슬기를 가르쳐준다. 가을이면 온갖 색깔로 만물에게 흥분의 절정을 맛보게 하고 절정 후에는 언제나 찾아오는 허무의 시간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치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다음 세대에게 편하게 넘겨주는 지혜를 터득하게 한다. 겨울이면 고난의 날이 지속되더라도 다음을 위해 참고 인내하는 끈기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일러준다.

이와 같이 활엽수가 있어 네 계절이 더욱 아름답다. 시대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며 조금은 멋스러운 삶을 꾸려가는 슬기가 문득 부럽다. 푸른 옷을 입고 싶으면 푸른 옷을 입고, 붉은 옷을 입고 싶으면 붉은 옷을 입는 개성이 좋아 보인다. 어찌 보면 활엽수가 있어 사철 푸른 소나무가 더 돋보이는 것은 아닐까. 주위에 누군가가 앞서가고 싶어 하면 그것을 들어주고, 뒤에서 너그럽게 웃고 있는 모습은 오히려 아름답다. 활엽수인들 왜 돋보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욕심 다 버리고 웃음만을 선택한 그 지혜가 슬기롭다.

이제는 사철 푸른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그 가치를 인정해주고, 계절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활엽수는 활엽수대로 그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다른 것들과 비교함이 없이 편협하게 세뇌된 가치의 인식은 오늘을 살아가는 데 부담이 될 수 있다. 각 객체마다 가지고 있는 의미를 받아들일 때 전체가 보인다. 전체 안에서 하나를 보아야 한다는 이치를 이제야 깨닫는 나는 참으로 아둔한 사람인가보다.

변해버린 세상을 살면서 가끔은 가치관의 혼란에 빠진다. 모든 물상들은 차별화하여 그 가치를 인정해줄 때 제 구실을 하게 된다. 하나의 잣대만으로 모든 것들을 재려 하면 획일화된 가치관 속에서 대상이 경련을 일으키게 된다. 변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나 자신이 변해야 하고, 모든 것의 가능성에 너그러워야 한다. 경직되어 고정화된 나의 편견은 부드러움을 요구하는 세상이 도래했음도 인정해야 한다.

사철수들의 푸름도 알아야 하고, 활엽수들의 시시때때로 변하는 슬기에도 넌지시 눈을 주는 배려도 있어야 한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나무들의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 어떠한 이야기가 되든 귀를 기울이겠다는 마음다짐이 필요하다. 이제 새 학기도 되었으니 연구실 문도 열고, 정원의 나무들처럼 자란 학생들과 나무 이야기를 하며 담배 예절도 가르쳐야겠다.
<수필과 비평>, 200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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