權多身圄(권다신어) 名多身汚(명다신오)


▲서영천/본지 사장

2015년 봄 정국을 강타한 '성완종 리스트'에 불이 붙었다. 살아있는 권력의 실세들이 줄줄이 거명되고 각종 증언과 의혹들이 꼬리를 물면서 권력형 게이트로 비화하는 형국이다. 이번 사건은 집권 3년차를 맞아 '정윤회 파문'의 고비를 넘기고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박근혜 정부에 던져 진 핵폭탄이다. 한마디로 정권의 명운이 시험대에 올랐다.

거론된 인사들은 하나같이 현 정권의 최고 실세들이다. 늘 그렇듯 당사자들은 "전혀 그런 사실이 없다"며 잡아떼고 있다. 돈을 준 사람이 세상에 없으니 진실은 고사하고 되레 의혹만 키우지 않을까 염려된다. 어떻든 검찰수사가 시작됐으니 결과는 나올거다. 그걸 국민이 받아들이든 말든 야권은 다시 특검을 들고 나올거고 내년 총선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이다.

팔순이 지척인 나이에 정적(政敵)들로부터 '노회하다'는 비판에도 끄떡없이 최고 권력을 보필하고 물러난 인사는 이번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짐작컨대, 그의 성정(性情)으로 보아 돈을 받고 안받고 문제가 아니라, 거명된 자체만으로도 체면을 구기고 큰 충격을 받았을게다.

여기에다가 어느 인사는 故人과 나눈 대화 내용이 얼마나 궁금했든지 15번씩이나 전화를 건 사실이 드러나 곤욕을 치렀다. 후보 지명 후 사석에서 나눈 대화가 공개돼 망신을 사고 청문회장에서도 용케 살아남아 권력을 꿰찼지만, 이번에는 '비타500박스'의 주인공으로 3천만원짜리 KO펀치를 한방 먹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돈을 받았으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국민들 앞에 겁박 수준의 말까지 했을까.

의료원 폐쇄와 무상급식 중단 등 꾸준한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을 벌여왔던 유명인사도 마찬가지. 2011년 당 대표 경선때 측근이 1억원을 수수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만신창이가 돼 버렸다. 민심마져 등을 돌렸는지 벌써부터 '보궐선거'설이 나돈다. 불과 며칠전까지 기세등등하더니 이젠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 날렸던 친정으로부터 가장 먼저 소환될 운명에 처해 있다. 권불삼년(權不三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一紅)이다. 이게 다 권력을 거머쥐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다.

故人은 빈손으로 자수성가한 기업가로 알려져 있다. 가난 때문에 못다한 공부에 한이 맺혀 고향에서 장학사업도 꽤 했던 모양이다. 그런 그가 기업가로 끝까지 남아 있었다면 존경받고 여유로운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故人을 욕되게 할 의도는 없지만 권력과 돈의 관계를 너무도 잘 헤아려서일까. 갖은 고생 끝에 엄청난 부를 축척하고도 정치판으로 눈을 돌린 게 화근이다. 돈 있는 국회의원이 돼 잘나갈때는 여기저기서 모시고 떠받들었다. 정작 사정(司正)의 타켙이 되자 어느 누구도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냉혹한 정치판을 너무 순진하게 봤던 걸까. 권력과 돈은 늘상 그렇게 얽혀 돌아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우쳤을땐 그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맞고 있었다.

이참에 우리 거제지역을 한번 돌아보자. 평생을 넉넉히 먹고 살아도 남을만한 재산을 가졌는데도 또 뭐가 아쉬웠는지 정치판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입으로는 시민을 위한 정치를 떠벌린다. 그런데 행동을 보면 결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다. 정치를 사업처럼 여기는 듯하다. 그들에게 권력은 돈을 지키고 불리는 수단이다. 평소엔 뭐하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저 술에 술 탄듯 물에 물탄 듯 있으나마나한 존재들이다. 돈이 있으니 권력을 가졌고 돈을 지키기 위해 권력이 필요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무탈한 노후를 원한다면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비록 돈도 배경도 없지만 뚜렷한 소신을 갖고 용감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길을 터주고 하루빨리 떠나는 게 그나마 지혜로운 처신이다.

완장이나 감투라면 사족을 못 써는 자들도 딱하기는 마찬가지. 이런 인간들은 자기가 빠지면 세상이 안돌아가는 줄 안다. 스스로를 되돌아볼 줄 모르기 때문에 모든 사고는 자기를 중심으로 이해한다. 그들에게는 끊임없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주목받게 하는 특출한 재주가 있다. 물론, 남의 잘못에는 인정사정이 없다. 늘 상대를 노리다가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가차없이 퍼 붇는다. 평소엔 더 없이 점잖고 인자해 보이지만, 뒷거래는 거의 달인의 경지에 올라있다.

행정(行政)은 이들에게 가장 만만한 밥이다. 민원을 빙자해 사사건건 개입해 이득을 취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때론 혼자만의 생각을 여론으로 포장해 왜곡하기도 한다. 이런 병적(病的) 수준이니 당연히 민심은 헤아릴 줄 모른다. 원로로서 높은 경륜과 포용은 커녕, 오로지 허망한 노욕(老慾)만이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할 뿐이다. 그러니 죽지 않고서야 개과천선은 턱도 없다. "권세 휘두르다가 감옥 가고(權多身圄), 이름 많이 날리다가 몸마저 더럽힌다(名多身汚)". 세상의 이치(理致)를 거스르는 이들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새거제신문 saegeoje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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