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소 값이 두 배로 뛰었다. 흔히 장마철에 있는 일이다. 긴 장마철에는 어느 채소든 값이 오르기 마련이다. 연약한 채소가 비에 맞아 녹아 버리기도 하고, 출시를 위한 작업을 하지 못하여 값이 오르기도 한다. 이런 때는 제 손으로 경작하여 먹는 사람이 가장 뱃속이 편하다. 경작의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다. 제 손으로 농사지어 제 입에 넣으니 무에 그리 신경을 쓸 일이 있겠는가. 가격의 변화에 민감할 필요도 없고, 그냥 거두어 먹으면 되는 것이다.

긴 장마 끝에 채소를 뽑아오려고 남새밭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 심어 놓은 채소가 다 없어졌다. 누군가가 다 후려 갔다. 배추, 상추, 정구지, 쑥갓, 대파, 깻잎. 어느 하나 손을 타지 않은 것이 없다. 이제 겨우 자라 거두어 먹겠구나, 하고 나가 보니 모두 후려 갔다. 몇 잎만 가려 간 것이 아니다. 아예 줄기 채소는 꺾어 갔고, 포기 채소는 송두리째 뽑아갔다. 짬을 내어 가꾸어 놓은 채소밭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뜨거운 뙤약볕에서 얼굴을 태우며 풀도 뽑아주고, 먼데서 물을 길어와 가뭄도 이기게 해 주었는데, 모두 도려 갔다. 그 동안 수고의 흔적은 간데없고, 내 가슴속에 허망한 빈터가 생기고, 그곳에 불신의 씨앗만이 싹을 틔우고 있다. 

이곳에 와서 나는 매년 농사를 짓는다.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짓다보니 가끔 남의 손을 탄다. 동네의 할머니들이 지나다가 몇 잎 맛을 보기 위해 손을 대는 것은 시골의 인심이려니 한다. 아니, 할머니들이 좀 욕심을 내어 시장에 내다 팔아 손자 녀석 과자 값하는 것은 그래도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줄기를 꺾어가고, 송두리째 포기를 뽑아가서 주인이 맛도 볼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은 지나치다.

채소를 담으리라 가지고 갔던 빈 바구니에 허망스러운 생각만 가득 담아 나오면서 많은 상념에 잠긴다.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주려 해도 이것은 아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부아를 누르려하니, 더욱 감정이 상한다. 이렇게 남의 노력을 가져가도 되는 것인가. 이번 경우는 할머니들의 손자 과자 값으로 바뀐 것이 아닌 것 같다. 이 많은 양의 채소를 한꺼번에 처리한 것을 보니, 여러 명 힘 있는 사람들의 소행이 분명하다. 정말 참을 수 없었다. 조금만 일찍 나왔더라면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앞선다. 그렇다고 채소를 가져간 사람을 찾을 수도 없다. 

만약 현장을 목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것도 난망한 일일 것 같다. 그냥 바라보는 것 외에는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멱살을 잡고 싸울 일도 아니고, 경찰에 연락해 도둑으로 밀어 죄인을 만들 일은 더욱 아닌 것 같다. 괜히 주인 행세하다 볼썽사나운 일만 생겼을 것 같다. 차라리 마주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고개를 든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서서히 부아가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래, 잡아서 무엇 하랴. 오히려 더 서로의 입장만 어색할 것이다. 차라리 아니 보기를 잘 했다. 어찌 보면 오늘은 재수가 좋은 날이다 싶다. 허나 이건 아니지 않는가. 길러 놓은 채소가 다 없어진 것은 그렇다 쳐도, 내가 열심히 채소를 기른 행위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결국 도심(盜心)을 키우는 데 일익을 담당한 것이 아닌가. 내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남새밭을 가꾸지 않았다면 그들은 후리어 가려는 마음을 아예 갖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잘못된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도심을 키울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나는 돌아오면서 이상한 논리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논리의 중앙에 내가 앉아 있었다.

결국 그 중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그들의 행위를 훔쳐간 것이 아니고, 가져간 것으로 매듭짓기로 했다. 그러자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 많은 것을 그들은 나를 위해 가져간 거야. 내가 혼자서 수확하여 여러 사람의 입에 닿도록 노력해야 하는 수고를 대신해 준거야. 일일이 다듬어서 이곳저곳에 나누어주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지 않는가.

요즈음은 채소를 길러 남을 주려 해도 눈치를 봐야 한다. 괜히 만지기 싫어하는 채소를 갖다 주어 쓰레기를 늘려주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나가면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담근 김치가 있고, 무쳐놓은 나물이 있기에 반가워하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남는 채소를 주려면 상대방의 눈치를 봐야 한다. 좋아할 사람인가, 아닌가. 밭에다 심어서 키워 놓은 채소를 뽑아다 먹어라 해도 오는 사람이 없다. 뽑아 가는 주부는 한 세대는 먼저 산 사람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뽑아서 갖다 주어야 한다. 그도 흙이 묻어 있는 채소를 갖다 주면 깨끗한 아파트에 누가 되니, 다듬어 줘야 한다. 아내와 나는 밭에서 채소를 수확하며 누구에게 줄 것인가 마음에 정하고 다듬고 있기가 일쑤다. 대개 요즈음은 노인들이 아니면 채소를 주어도 고마워하질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일이 하나 더 생긴다. 노인들의 번거로운 손을 덜어 주기 위해 아예 드실 수 있도록 음식을 만들어 드려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내 채소를 가져간 사람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어차피 돈으로 바꾸기 위해 지은 것도 아니고, 나누어 먹고자 한 것이니, 누구의 입에 들어간들 무슨 상관이랴. 다만 질병으로 농약이 없는 채소가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된다면 다행일 뿐이다.

사람은 어떠한 일이든 생각하기에 따라 그것의 의미가 다르게 인식되어진다. 조금 전만 해도 그렇게 부아가 치밀던 일이, 이제는 오히려 잘된 일이다 싶다. 나의 공적을 훔쳐 가는 사람이 있어도, 그 공적으로 내가 무던히 괴로워할 것을 염려하여 옮겨갔다 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은 제 자리에 놓일 때, 가장 이상적이라고 할지라도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미련 없이 놓아 버리는 것이 훨씬 건강에도 좋다.

이번 주에는 시장에 나가 비싼 채소를 사 먹어야겠다. 돈이 든 만큼 내게 가르쳐 주는 것도 많으리라 믿는다.   <“현대수필”  2002년 겨울호>        
 
       

편집부  news@geojejournal.co.kr

<저작권자 © 정의로운 신문 거제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