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일을 생각해 본다. 무엇인지 모르는 것에 쫓기며 산 것 같다. 주위 사람들과 원만하지 못한 한 주일이었음도 후회한다. 어디까지 원칙을 따르고, 어디부터는 너그러워야 하는 것인지를 가늠할 수가 없다. 얼마나 더 노력해야 나에게 슬기로운 지혜를 터득할 날이 찾아오려는지. 오늘도 역시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황악산 직지사를 향한다. 아무리 반성을 하고 자연에서 너그러운 마음을 배우려 산에 올라도, 번번이 달라짐이 없는 속 좁은 자신에게 부아가 치민다.

새벽 열차를 탔으나 그리 피곤하지는 않다. 직지사역에 내리자 이른 아침의 가을바람이 볼에 와 미끄러진다. 상쾌하다. 추수가 거의 끝나가고, 들판은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논두렁에 기대고 선 볏단들이 달라붙어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그 모습이 정겹다. 논바닥의 지푸라기를 헤집고 올라온 아침 실안개가 풀어헤친 머리로 다정히 우리 일행을 맞는다.

정갈하지 않은 모습이라도 속내가 드러나 반갑다. 지금 막 간이역을 빠져나간 열차가 기적소리를 울리자 나뭇잎은 이슬을 털고 오색찬란한 단풍을 내놓는다. 철길 위를 달리는 열차와 도로 위의 자동차가 교차하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으로 내 눈앞에서 표구된다.

골짜기는 이제 겨우 기지개를 켜는데, 촌부는 벌써 추수에 바쁘다. 와랑와랑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가 보면, 논 가운데에서 추수가 한창이다. 짚단을 들고 발로 기계를 밟는 일꾼들의 모습이 정겹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호흡이 맞는 그 모습이 정말 보기 좋다. 매사에 저렇게 순조롭게 교감하며 살면 얼마나 좋을까?

절의 입구에 다다르니 다리가 있다. 그 밑에서 울려오는 물소리가 달려와 내 몸을 닦아 내린다. 내 삶의 때도 닦아낸다. 저 조잘거리는 소리. 냇바닥의 조약돌과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 나뭇잎도 띄우고 수줍은 꽃잎도 띄우며 즐겁게 노래 부르는 소리. 어쩌면 이토록 한 마음이 되어 즐겁게 노래 부를 수 있을까?

다리 위에 섰다. 이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 불가의 세계와 속세의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아닌가. 속인도 맘대로 건너올 수 있고, 스님도 속인을 만나러 갈 수 있는 다리. 이 다리는 무수히 많은 중생이 속세를 버리고 불가에 입문하려다 두고 온 인연이 그리워 주저앉은 곳이기도 하고, 중생들의 우매한 넋두리를 다 들어주고 그들 스스로 지혜를 깨닫게 한 곳이기도 하다. 또 스님께서 흐트러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가사를 여미고 돌아선 다리이기도 하다.

다리 저만치에 있는 돌에 가 앉는다. 언제 왔는지 새 한 마리가 나를 반긴다. 돌 옆을 굴러 흐르는 물소리와 새소리가 어우러진다. 가을바람을 타고 풍경소리가 들려온다.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연의 소리에 빠져 있었다. 이렇게 부드러운 화합의 슬기를 어찌하면 배울 수 있을까?

넋을 잃고 앉아 있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수녀님에 의해서였다. 수녀님 두 분이 직지사에 오신 것이다. 의외였다. 아직까지 나는 절에서 수녀님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매우 흥미로웠다. 나의 시선은 수녀님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가을 단풍 속을 걷는 그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때 반대편에서 스님 한 분이 수녀가 오고 있는 쪽을 향해 왔다. 정확히 그들은 내 앞에서 마주쳤다. 단풍이 곱게 든 사찰의 다리 위에서. 수녀들은 합장을 하고 스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수녀의 모습이 한결 고아해 보였다. 순간 사진으로 보관하지 못함이 안쓰러웠다. 이 다리는 두 종교를 이어주는 고귀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문득 어느 주임 신부님 생각이 난다. 한 가톨릭 신자가 모난 성격을 다스리다 지쳐 신부님을 찾아갔다. 신부 방에 들어서며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신부님 의자 뒤에 석굴암 보존불 사진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신자는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황당한 표정만을 짓고 있는 신자에게 신부님은 웃으면서 한 말씀 하셨다.

“왜요? 이상해요. 남의 종교를 알아야 내 종교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이 신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신부 방을 빠져 나왔지만,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매사에 부드러워지는 자신에 만족하게 되었다.

다리는 갈라진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흐르는 강물에 의해 갈라진 두 지역도 다리를 놓음으로써 쉽게 오갈 수 있다. 아무리 특성을 달리하는 곳이라 해도 다리만 놓으면 연결된다. 어디까지나 수평이다. 어느 한쪽이 기울어 마음 아프게 함이 없다. 깊은 산중 험한 곳이라 해도 양쪽에 서운함이 없이 똑같게 연결한다. 그리고 모든 이의 마음이 다리의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직지사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다. 차창에 수녀님과 스님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합장하며 서로의 마음에 다리를 놓던 그 아름다운 모습이. 그것도 다리 위에서.
<문예시대>, 2000.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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