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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수필 서정윤] '조랑말'거제계룡수필문학회원
거제저널 | 승인 2018.04.13 12:43

여행 마지막 날이다. 차 창밖으로 억새밭이 장관이다. 생의 절정기를 맞은 꽃들은 하얗게 바랬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들은 잠시 쉬어 가라고 여심을 유혹한다. 그림 같은 풍경을 카메라 대신 마음에 그린다. 

차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하라고 멈췄다가 천천히 달리기를 반복한다. 얼마든지 카메라를 꺼내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년에 또다시 이곳을 찾아올 구실을 줄 요량으로.

시끌벅적하던 차 안이 조용해졌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누구나 공감하나 보다. 억새밭은 빠른 템포의 노래에 흥을 주체 못하던 모습들을 한순간에 잠재운다. 친구들은 수채화 같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카메라를 들이댄다. 가을의 풍경을 담아 추억을 저장하느라 부산스럽다.

이박삼일 일정이다. 친구들과 제주도여행을 와서 뜻밖의 횡재를 한 것 같다. 너무 빤 한 관광코스라고 투덜대는 몇몇 친구들 때문에 일정표에 없는 장소를 택했다. 오랫동안 관광객을 상대한 가이드의 탁월한 선택이 우리 팀에게 적중했다. 

멀리서 보면 눈꽃 축제를 벌여놓은 듯하다. 높고 푸른 하늘과 끝없이 펼쳐진 억새 숲의 조화가 불혹의 여인들에게서 환호와 감탄사가 빗발쳤다. 하지만 마냥 좋아라 할 마음이 안 생긴다.

함께 즐기고 환호하면 좋으련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 무거운 뭔가가 자꾸 가슴 한편을 짓누른다. 이곳을 찾아오면서 잠시 들린 마장에서 마닥트린 조랑말 때문이다. 

넓은 대지 위에 여러 마리가 무리지어 있었다. 그 중 한 녀석이 울타리 너머로 시선을 두고 있어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치려 했다. 이곳 제주에는 흔한 동물이기에. 

마이크 선을 타고 건너온 무미건조한 가이드의 설명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왔다. 순간, 듣지 말았어야 할 그의 한마디가 신경을 자극했다.

“저 조랑말은 평생을 짐만 나르다 생이 끝난 다네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누워서 잠을 못 잔답니다. 이곳 조량말의 운명인 거죠!” 남의 운명이라고 참 쉽게 말한다. 

그의 직업이니 타박할 여지는 없다. 관광객을 대할 때마다 구구단 외우듯이 감정이 메마른 설명을 했을 게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평생 짐만 나르다 짧은 생애를 마감하다니. 평생 동안 등을 뉘어 쉴 수가 없는 운명이라니. 너무 가혹한 형벌이다. 지나쳐온 몇 발자국을 되돌려 다시 한 번 녀석과 대면했다. 

다른 종류의 말보다 등치가 작다. 갈귀는 순종과 복종을 미덕으로 내세워 가지런히 잘 다듬어져 있다. 등은 짐을 싣기 좋을 만큼 적당히 굴곡져 있다. 단단한 등의 근육은 평생 져야 할 짐의 무게를 반증하듯 보이지 않는 운명처럼 살짝 굽어있다. 

가늘고 딱딱한 다리는 출발선에서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듯이 땅을 디디고 섰다. 어질고 선한 눈망울은 거울처럼 맑다. 녀석의 눈 속에 내가 비친다. 작고 초라한 모습이 어딘가 나와 닮은 듯하다. 

나이에 비해 심하게 내 등도 굽어있다. 돌아보면 한 때는 혼자 무거운 짐을 지고 지낸 시간이 있었다. 작은 가게의 수익으로 자식들과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때 가난한 남편은 조금 더 임금이 좋은 수입을 위해 객지생활을 했었다. 

나는 사는 게 여유롭지 못해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너무 어렸고 남에게 도움을 청할 만큼 원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주어진 삶의 부피를 등에 지고 살았다. 삶의 무게가 어깨에 쏠려 등이 심하게 굽어 갈 때 고통이 찾아왔다. 잠 못 드는 밤이 여러 날이 지나서야 병원을 찾았다. 재활치료와 약물로 적당히 타협했다. 하지만 한번 굽은 등은 제자리를 잃고서 앉으나 서나 구부정하다. 

곧지 못한 등 때문에 늘 한쪽 벽면에 기대어 앉는다. 앞으로 숙이지 않으려고 턱을 들고 뒷목에 힘을 주곤 한다. 자세에 집중하느라 상대의 의견이나 행동에 예의를 갖추지 못한다. 경직된 얼굴은 딱딱하고 차갑게만 보일 게다. 중요한 모임이나 체면을 차려야 할 자리는 피하기 마련이다. 불구가 된 한때의 삶을 들키기 싫어서다. 

몇 시간 후면 이곳을 벗어날 것이다. 지난 이틀 동안 밤도 잊은 채 신나게 일상의 탈피를 즐겼다. 오랜만에 가진 여유가 기분 좋은 피로감으로 밀려온다. 

축척된 이 피로감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고 싶었다. 맞닥트리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이방인 같은 녀석 때문에 혼란스럽다. 타고난 운명을 어떤 타협이나 대체방법이 없기에 마음이 무겁다. 다시 삶의 궤도에 돌아가면 아린 마음이 괜찮아 지려나. 메마른 억새가 바람에 끝없이 흔들린다.

거제저널  gjnow32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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