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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시민단체, 김백일장군 동상 옆에 '친일' 단죄비 세워6·25 전쟁 흥남철수 공적 불구, 일제 때 '독립군 토벌' 행적 여전한 논란…단죄비 건립, 절충적 사례 평가
서영천 대표기자 | 승인 2019.03.01 23:18
<사진=친일김백일동상철거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 제공>

3·1만세운동 제100주년인 1일 정오 시민단체들이 만주군 장교로 근무하며 항일독립군 토벌에 참여한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김백일 장군 동상 옆에 친일행적 단죄비를 세웠다.

38개 거제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친일김백일동상철거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집행위원장 류금렬)'는 이날 김백일 친일행적 단죄비 취지문 낭독과 단죄비 제막(가림막 걷어내기) 및 경과 보고, 기념사, 3.1운동 100주년기념식, 독립선언서 낭독 순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높이 3미터의 ‘단죄비’는 스테인리스 판으로 제작됐다. 4면에는 김백일의 친일반민족행위와 행적이 기록되고 건립 취지문, 참여 시민사회단체 명단 등을 새겼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오 선생의 글귀도 새겨 넣었다.  

단죄 취지문은 3·1운동이 일어난지 100년이 됐지만, 여전히 친일행위자들을 단죄하지 못하는 현실을 알리고자 거제시민들이 힘을 모아 단죄비를 건립했다는 요지를 담았다. 

앞서 세워진 김백일 동상은 문화재 관련법을 지키지 않아 숱한 논란을 낳았다. 하지만, 이번에 세워진 단죄비는 경남도의 문화재형상변경 영향 검토 등 법적, 행정적 절차를 거쳤다.

대책위측은 단죄비 건립 하루 전날부터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밤새 '경비'까지 서 가며 이날 행사를 준비해 온 걸로 알려졌다. 

한편, 김백일 장군의 행적은 해방 전후의 평가가 진보나 보수적 관점에 따라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보수측에서는 김백일 장군이 6·25 전쟁 흥남철수작전 때 미군과 함께 북한 피란민 10만여명을 군함에 태워 거제로 탈출시킨 공적 등으로 추앙하고 있다.

2011년 5월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을 세운 사단법인 흥남철수작전 기념사업회는 "김백일 장군은 해방 후 한국전쟁 당시 제1군단을 이끌고 처음으로 38선을 돌파했다. 흥남 철수작전 때 10만여 명의 피난민을 해상 수송을 통해 구하는 등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30대에 생을 마감한 영웅"으로 평가했다.

반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평가는 정반대다. 2009년 위원회에서 발간한 '친일규명보고서'에 따르면, 김백일(본명 김찬규)은 당시 독립군 토벌을 위해 1938년 12월 창설된 간도특설대의 창설요원으로 1943년 9월 일제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5위 경운장'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라, 거제지역 시민단체들은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김 장군이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다며 동상 철거를 줄곧 요구하면서 최근까지 거제시청 정문 앞 등지에서 1인 시위를 벌여왔다.

대책위는 이날 "지난해 10월 23일 김백일 동상 앞에서 대책위 재출범 및 동상 철거를 위한 기자회견을 연 뒤 현재까지 117일 동안 거제시청 앞에서 집회를 이어 오면서 철거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친일 동상이 철거될 때까지 동상과 나란히 ‘단죄비’ 를 세워 부끄러움을 조금은 덜고자 한다"는 건립 취지를 밝혔다. 

대법원은 그의 친일 행적이 알려지면서 건립 당시부터 거제시민사회단체의 철거 요구가 거셌으나, 관련 행정소송에서는 김백일 동상을 현재 자리에 그대로 두라고 판결했다.

결국 이번 단죄비 건립을 계기로 그동안 지역사회에서 숱한 갈등을 빚어왔던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 논란은 절충적 대안을 수용하면서 최종 평가는 후대의 몫으로 남겨두게 됐다.

이날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양쪽 모두 불만이 없지 않겠지만, 이번 사례는 첨예하게 엇갈리는 지역사회 갈등이나 쟁점을 보편적 관점에서 민주적으로 타협하는 좋은 선례가 될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김백일에 대해 Daum 인물 백과에 수록된 내용이다.

<개설>

본명이 김찬규(金燦奎)였으나 해방 후 김백일로 개명하였다. 1917년 1월 30일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나서 1951년 3월 28일 6·25전쟁 당시 지휘관으로 활동하던 중 뜻하지 않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7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태어나서 1935년 보성학교를 졸업했다. 1936년 만주국에서 장교를 양성하는 봉천군관학교의 5기 군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지린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제1구대에 배치되어 1937년 9월 졸업하였다. 견습사관을 거쳐 그 해 12월 만주국군 보병소위로 임관되어 제3군관구 예하 보병 제15단에 배속되었다.

1938년 12월 무렵 강재호, 신현준, 송석하, 마동악과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복무하였다. 간도특설대는 젠다오와 러허 일대에서 항일무장부대를 공격하여 일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특수부대로서 동북항일연군과 팔로군 토벌작전을 모두 108차례 벌였다. 1939년 12월부터 주로 젠다오성에서 조직을 강화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진압하였다. 1941년 3월 보병중위로 진급하였다. 일제침략에 적극 협력한 공로로 1943년 9월 만주국 정부로부터 훈5위 경운장을 받았다. 1944년 1월 15일 부대원들과 함께 러허성으로 옮겨 팔로군 토벌작전을 수행하였고 3월 만주국군 상위(대위)로 진급하여 제1련(중대) 연장(중대장)이 되었다. 1945년 1월부터 간도특설대가 만주국 허베이성 기동지구에 주둔해 팔로군과 민간인을 상대로 한 치안숙정 공작을 펼쳤다. 8월 20일이 되어서야 팔로군으로부터 일제가 항복하였다는 사실을 듣고 예하 부대원들과 함께 진저우로 이동해 8월 26일 부대 해체식에 참여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해방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1945년 12월 간도특설대 동료인 최남근, 백선엽과 함께 월남했다. 월남하면서 온 세상이 붉게 물들어도 홀로 반공에 입각하여 청천백일과 같이 살겠다는 뜻으로 김백일이라고 개명하였다.

1946년 2월 육군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부위(중위)로 임관하였고, 국방경비대 제3연대 창설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제3연대장, 국방경비사관학교 교장, 특별부대 사령관을 역임하였다. 1948년 10월 19일 국군 제5여단을 이끌고 현지 사령관으로 여순·순천사건을 진압하고 1949년 옹진지구 전투사령관으로 옹진반도 전투를 지휘하였다. 육군보병학교 교장과 제3사단장을 거쳐 1950년 4월 육군본부 행정참모부장에 임명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소장 김홍일의 뒤를 이어 육군 준장으로 제1군단장을 맡았다. 그 해 9월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휘하의 1군단이 10월 1일 맨 먼저 38선을 돌파해서 원산과 청진을 지나 혜산진까지 북상하였다. 대한민국에서 이 날을 기려 ‘국군의 날’로 제정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 해 10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되었다. 중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이를 물리치고 흥남철수 작전에서 10만명의 민간인을 해상수송을 통해 구출하였다. 1951년 3월 28일 제8군사령부에서 회의를 마치고 군단본부로 급거 귀대하기 위해 악천후를 무릅쓰고 비행기에 올랐다가 대관령 인근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 이후 육군 중장으로 추서되었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1966년 10월 서울 국립현충원 장군모역에 안장되었다.

<사진=친일김백일동상철거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 제공>
<사진=친일김백일동상철거거제범시민대책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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