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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양득] 하청초 100주년에 즈음하여황양득 / 하청초 1975년도 입학생
거제저널 | 승인 2022.04.04 12:50

추억의 신진호는 신진화를 싣고...

녹산 공단을 관통해 10번 신호등에서 좌회전하면 우측으로 거대한 컨테이너 신항을 스치고 좌측으로는 가덕도 너머 명지, 다대포가 바라보인다.

차는 계속해서 거가대교를 향해 신나게 달린다. 곧 해저터널을 지나 故 박정희 대통령의 생전 별장이 있는 저도를 눈앞에 두고 웅장한 거가대교와 성큼 다가온 정겨운 버드레(유호)를 마주한다.

필자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거가대교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45년 전의 신진호를 타고 추억의 물살을 가른다. 상유에서부터 오는가? 아니면 하유인가? 총총히 헐떡이며 달려오는 통통배는 아! 가고픈 고향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추억의 신진호는 오후 3시에 영도대교를 지나 우측으로 송도의 퇴적층 해안선의 신비함에 탄성이 나올 즈음 불어닥치는 거센 파도를 가른다. 이 파도는 낙동강 하구에서 내려오는 강물의 속도를 타고 30여 분 이상 멀미가 두려운 많은 승객을 선실에서 꼼짝없이 누워있게 하곤 했었다.

여기저기서 반가운 친구들과 이웃끼리 고스톱판과 술판이 벌어졌고 담배 연기 자욱한 선실들은 70년대 중반에는 그야말로 정겨운 일상이었다. 승선권이 없는 사람들은 표를 확인하는 검표 선원을 피해 이리저리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그래도 다 용서가 되는 시절이었다.

유호를 떠나 다시 배는 진해를 멀리 바라보며 힘차게 구영을 지나 황포로 향한다. 선착장이 없던 사정이라 황포 역시 도선이 신진호를 반갑게 맞이한다. 삼판이라고 불렸던 선착장을 제대로 갖춘 곳은 장목과 하청 그리고 고현뿐이어서 처음 방문하는 관광객들과 마음이 급한 주민들은 가끔 장목과 하청을 혼동하곤 했었다.

한여름이면 장목, 그리고 칠천도로 이어지는 뱃길의 반짝임과 아름다운 파도 소리, 옥계와 와항(왜꼬지) 사이의 등대는 이곳이 꿈에도 못 잊을 고향, 하청 마을의 이정표이리라. 배는 석포 앞바다의 노을을 향해 저 만치 달려 가고 있다. 내가 왔다는 뱃고동 소리는 하청 동네를 진동시키고 한달음에 어머니 품으로 달려가고픈 심정을 누가 알리요?

필자는 7살 즈음에 장승포에서 하청으로 이사를 왔다. 당시 집안에서 여객선 사업을 하던 차 선친은 신진호의 기관장으로 하청에서 매표소 일까지 맡아 이주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은 하청 삼거리에 있는 희다방을 인수해 하청 동네의 사랑방처럼 운영하셨다.

자그마한 시골 하청의 정치, 경제, 연애, 오락, 그리고 축구의 메카가 희다방이었다. 자연스럽게 필자는 신진호 기관장 아들이자 희다방집 아들 그리고 하청 조기 축구회 회장 아들로서 제법 유명세와 어린 나이에 감투를 많이 쓴 개구쟁이였다.

공부보다는 이러 저러한 어른들 소식과 철부지 장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학교는 늘 지각이었고 학기당 한두 번은 결석이고 반장임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중하위권 정도였다. 그래도 인기는 많았었다. 부친을 따르던 분들을 모두 삼촌이라 불렀으니 든든한 백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다방집 아들로서 특혜도 많았었다.

하청초의 남자 선생님 중에서, 특히 필자가 2, 3학년이었을 당시 교감 선생님은 자주 예쁜 레지 이모들이나 마담 소식을 만날 때마다 물어보셨다. 그런 관심과 인연 덕택으로 교감 선생님은 당시 국민교육헌장을 제대로 외우지 않던 필자를 직접 지도해 주셨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지금 다시 한번 읽어 보니 그 당시 암기했다는 사실에 강한 의문이 든다.

아침 식사를 거르거나 준비물을 챙겨 오질 못한 날이면 다방 이모들이 가끔 달걀 토스트를 부치고 밀크커피를 가져와서 선생님을 중심으로 몇몇 친구들과 쉬는 시간에 함께 먹곤 했었다. 축구공이 없다는 선생님들의 부탁에 쉬는 시간마다 다방까지 뛰어가서 다방 카운터 밑에 있는 조기회 축구공을 가져오기도 했었다.

봄가을 소풍 때면 저 먼 앵산 주변이나 대금산 진달래 군락지까지 걸어서 갔다. 초등 저학년임에도 2~3시간을 걸어서 갔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TV와 전축 덕분으로 방송 대중문화를 일찍 접했던 필자는 노래와 춤에 재능보다는 관심이 많았었다.

어느 소풍 때는 어머님의 등쌀에 전교생 장기자랑도 나갔던 에피소드도 있다. “우리 아들 춤 잘 춥니다”라는 어머님의 자랑에 전교생은 송아지를 부르고 필자는 디스코 율동을 했던 당시의 어색난감이 지금도 느껴진다.

그런 소설 같고 꿈같은 초등시절을 겨우 4년도 채우질 못했다. 자식의 미래가 불안했던 부모님께서 부산으로 전학을 보내셨다. 비록 급우들에게 “섭섭합니다”라는 말 한마디였지만 언젠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정든 하청에 다시 오리라는 맹세는 지금도 필자의 나침반이다.

하청부두에서 부친과 함께 신동마을 집으로 걸어오는 길은 여간 먼 길이 아니었다. 어서 빨리 어머님을 만나고 두 여동생과 광호 친구를 만나면 꼭 물어보는 안부가 있었다. “진화는 잘 있나?” 초등학교 1학년부터 나의 영원한 애인이었다. 1학년은 함께 공부했으나 진화는 1학년을 두 번 했다. 불과 몇 년 전에 진화 어머님께 어떤 사정으로 1학년을 2년간 보냈냐고 여쭤보니 그냥 한 살 어려서 잘 적응을 못 하는 것 같아서 선생님께 부탁해서 1학년을 두 번 했다는 대답을 들었다.

지금도 그것이 가능할까? 신진호 기관장 아들인 필자는 신진호가 본인의 분신이었다. 자연 이름이 신진화이고 어려서부터 부잣집의 막내딸로 자라 세련되었던 그녀는 본인의 영원한 반려자라고 생각을 했다. 물론 스물이 넘어서는 그런 생각을 안 했지만 말이다.

아직도 2020년 1월부터 시작된 코로나 유행병의 긴 터널에 있지만 오는 봄이면 하청초 100주년이다. 하청 유계장로교회가 5년 전에 창립 100주년을 먼저 맞이했고 이듬해에 하청교회가 100주년을 맞이했다. 거제에서 초등학교로는 하청초교는 거제초교와 장승포초교 다음으로 100주년 기념을 준비한다.

산도 물도 고운 하청이 역사와 전통을 품은 교육과 종교, 그리고 인문의 고장이라는 당당한 자부심이 솟구친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에 부산으로 전학을 간 필자는 솔직히 몇 회 입학생인지도 정확히 모른다. 그러나 “하청초교 100주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그 날이 오면 추억의 신진호에는 신진화도 타고 부산으로 되돌아간 박경숙이도 부친 따라 전학을 왔던 강정화도, 손석일이도, 일찍이 먼저 간, 뛰어나서 너무나 안타까운 김봉기도, 몇 해 전의 여치석이도 제주도에 사는 태일이도 추억의 친구들을 옥포에 사는 기애, 수웅, 종규 그리고 광호와 함께 하청 부두에서 맞이하리라.

다가오는 토요일에 하청초 교문 앞에 있는 해태상을 보면서 선친의 그리움을 먼저 달래야겠다.

거제저널  gjnow32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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