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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양득] 조선소 없으면 무얼 먹고 사나?
거제저널 | 승인 2022.08.12 13:32

지난 주말 시간을 내서 대우조선해양의 남문 근처의 골목길을 찾았다.

40여 년 전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1층은 귀에 익은 칠복식당이 자리하고 2층은 상호 및 간판이 없이 유리 창문에 카페, 커피라는 글자만 보인다.

그리고 3층은 노조 관련 사무실로 쓰이는 것 같은데 '소리통'이라는 단어만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3층은 기억에 없다. 1층도 그 당시 무슨 가게였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2층 입구가 그렇게 좁았고 진입 계단 또한 원형으로 이루어졌는지도 그날 알았다.

예전에는 조선소 앞 큰 도로에서 한참을 올라가야 그 건물이 나왔던 것 같은데 8차선으로 도로가 확장되다 보니 몰라볼 정도로 가까웠다.

40년 전 '회성다실'은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그 당시의 다방이나 다실은 요즘의 커피숍에 룸살롱을 합쳐 놓았다고나 할까. 1984년 이후로 결국 그 건물의 2층 다실은 문을 닫게 되었는데 그 원인은 조선소 불황이라는 부모님 대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다. 당시 하청에서 다방을 하고 있었기에 하나를 더 오픈한 셈이다. 조선소 호황에 편승해 가게를 열면 금방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하청과 남문을 오고 가면서 두 곳을 운영했다. 실패의 대내적인 이유는 무리한 확장으로 관리가 안 되었기에 영업이 지지부진했을 것이다.

그리고 '레지'라고 불리는 다방 이모들의 원만치 못한 수급도 실패의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종종 다방의 이모들이 줄행랑을 치려다 버스 타는 곳이나 다른 곳에서 가방을 빼앗겨 마지못해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이 촌구석에서 더는 못 살겠다“라는 넋두리와 하소연이 그때는 공공연했다.

아주동 남문에서의 사업 철수는 경제 사정을 더 악화시켜 지난 시절 화려하고 행복했던 거제도 고향 생활을 접고 후일 온 가족이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먼저 부산으로 전학을 가서 이런 사정을 제대로 알 길이 없었던 필자는 결국 사관학교로 가게 되고 정신을 빠짝 차리는 전화위복이 되었다. 78년 부산으로 전학 갈 당시 다시 꼭 돌아와 부모님과 함께 살겠다던 다짐은 임관 5년 차에 군을 떠나고 정치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게 했다.

조선소 불황과 파산은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등식이었다. 80년대 당시의 조선 경기불황은 결국 가정 경제의 파산이라는 큰 충격과 상처를 남기게 됐다. 87년은 필자도 육사 재수를 준비하는 중이어서 가끔 고향에 내려오곤 했었다.

대우조선소의 노조가 결성되어 열악한 근무환경 개선과 임금인상이라는 극단의 투쟁이 거제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당시에 파업에 참여했던 동네 삼촌들의 얘기도 대우가 곧 망할 것이라고 했다.

바닷물 때문에 전자제품 공장도 못 들어오는 이곳에서 앞으로 무엇을 먹고살는지 저마다 귀가 후에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한편 본인은 '기사회생'이라는 사자성어가 떠오를 만큼 우여곡절 끝에 재수에 성공해 이듬해에 육사에 입교하게 됐다. 조선소가 없으면 거제는 무엇을 먹고사나? 입교 후 4년간 생도 시절 동안은 잠시 잊고 있었던 질문이었다.

동료 소대장이 서울대 학군(ROTC) 출신이어서 중위 때는 서울대 교관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보직상 육사 출신이 중위 시절에 학군단 근무를 하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했지만 마침내 94년 3월에 서울대 학군단에서 근무하게 됐다.

서울대 ROTC 출신의 유명 인사들을 많이 만 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중 필자가 가장 인사와 친분을 나누고 싶었던 분이 서울대 학군 1기인 이건산업 박영주 회장이었다. 당시 서울대 ROTC 총동창회 회장으로 학군단 장교들에게도 관심과 격려를 많이 해 주던 차에. 94년 연말에 서울 신라호텔에서 회식 자리까지 마련해 줬다.

학군단 간부 중 제일 막내인 필자는 과감히 박 회장님 옆에 앉아서 당시의 솔로몬군도 조림사업 및 공익사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서울신문 주필을 비롯한 서울대 학군 출신 동창회 간부들과 즐거운 저녁 식사와 환담 뒤 마무리에 건의 사항이 없냐는 박영주 회장의 질문에 필자는 기회다 싶어 오른손을 번쩍 들어 서울대 ROTC 축구부를 만들 계획이니 지원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학군단장은 육사 26기 하용문 준장으로 육사 개교이래 축구를 제일 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1학년 생도 시절부터 3군사관학교 축구대회에 주전으로 출전을 했었으니 말이다.

회식 뒷날 필자를 불러, “단장인 나도 박 회장님이 어려운데 어떻게 축구부 지원 부탁을 했냐?”면서 무척 기뻐했다. 아쉽게도 이건산업 회장과의 인연은 딱 거기까지였다. 당시 출전 선수들은 필자가 주장으로 서울대 후보생 중 주로 체육교육학과 여러 명과 서울대에서 의대 및 법대 그리고 육사 교수위탁 교육을 받던 동기와 후배 중위 장교로 생도 시절 럭비와 축구를 한 자원으로 구성을 했다.

서울대 내 동아리 팀 중에서 학군단 싸울아비팀은 출전 전부터 경계대상이었다. 그러나 94년, 95년 모두 1차전에서 아쉬운 탈락을 했다. 우리 팀은 모두가 바빠서 시합 전 발을 한번 맞출 시간이 없었다. 공교롭게도 우리를 이긴 두 팀이 그해 우승을 각각 차지했었다.

남미 재외국민 특례 입학생 위주의 'PRO 84' 팀과 '서울대 농대 축구동아리'였다. 필자가 아쉬운 점은 준우승 정도만 했어도 이건산업 회장을 만나서 결과 보고 및 궁금한 한 가지를 물어보았을 것이다. 인천에서 터를 잡은 이건산업이 앞으로 사세 확장 때 거제나 부산으로 갈 의향이 있는지 궁금했다.

1980년 봄부터 부산에서는 국내 제일의 목재상이던 동명목재가 2세의 방만 경영과 원자재 인상으로 인한 경영 악화로 노동자들의 생존 투쟁이 날로 거세지고 있었다. 불행히도 3000여 명의 노동자의 삶은 방관한 채 동명목재는 문을 닫았다.

80년 5월17일 전국 계엄 확대 이전 부산의 뉴스를 장식하던 동명목재 사태를 보고 듣고 자란 어린 마음에 부산이나 거제에 바닷물 때문에 전자회사가 안 된다면 큰 목재 회사가 세워지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거제저널  gjnow32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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