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대 교수 강돈묵

태풍 ‘매미’가 지나간 지 한 달이 되었다. 여기 저기 널브러졌던 쓰레기들도 모두 치워지고, 다시 모든 것이 질서를 찾아간다. 산 숲정이의 말랐던 나뭇잎은 떨어지고, 부러진 가지는 서서히 본체와 이별을 나눈다. 
도로변에 있는 벚나무는 초봄 때처럼 검은 줄기를 내보이며 서 있다. 군데군데 부러진 가지를 수습하며 서 있는 모습이 보기에도 안쓰럽다. 가느다란 가지 끝에 하얀 꽃을 피우니, 더욱 을씨년스럽다. 가을 벚꽃. 담장에 기대어 선 앵두나무도 이번 태풍에 수모를 당하기는 매일반이다. 모진 바람에 이파리가 상처를 입었고, 끝내는 모두 말라 떨어지고 말았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끝에 연분홍 꽃이 피어난다. 가을 앵두꽃. 큰 키 나무 밑에 있는 진달래도 예외는 아니다. 살짝 숨어도 보았으련만,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긴 팔을 휘어잡아 흙바닥을 쓸었는지 이파리가 전혀 없다. 더러 남아 있는 마른 잎에는 진흙 덩이가 붙어 있다. 그 끝에 한 송이 꽃이 핀다. 가을 진달래.

수업도 중요했지만, 우선 대민 자원봉사가 더 시급했다. 학교를 휴교하고 자원 봉사를 나가기로 했다. 자신의 일정은 모두 버리고 오직 대민 지원에 맞추었다. 시청 소개를 받고, 동에 연락하고 주민과 약속하면서, 정말 피해가 심하다는 데 놀랐다. 태풍이 지나간 아침, 포구로 나와 실상을 보면서 낙담했던 나였는데도 놀라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 갔다.
학생들을 배치한 곳은 포구였다. 그 포구에는 연극이 끝난 무대 위의 소품처럼 가재도구가 흩어져 있었다. 관객이 모두 빠져나간 무대. 그 무료한 공간에 난장의 흔적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한발만 내딛어도 밟히는 쓰레기들. 질서를 잃고 내동댕이쳐진 것들은 마지막 순간의 아픔을 아직도 되씹고 있었다. 방파제 앞에 묶여 있어야 할 배는 뭍으로 기어올라 승용차의 허리를 타고 있었고, 갯가의 바윗돌은 선술집 출입문을 부수고 들어와 주인 행세를 했다.
포구의 쓰레기를 치우다보니, 주민의 불만이 흘러나왔다. 사람이 죽을 지경인데 포구 치우는 것이 더 급하냐는 것이었다. 자기 집을 먼저 해 달라는 것이다. 말인즉 맞다 싶어 학생들에게 지원을 부탁했다. 
남학생들만으로 나간 곳은 들판의 비닐하우스였다. 태풍이 남긴 상처는 여기에도 심했다. 농부가 여름내 가꾸어 놓은 작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찢기어 날아간 비닐 조각을 모으며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숨기느라 고생했다. 쇠파이프 위에 올라가 태풍의 잔해를 걷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람을 맞으며 하는 작업은 위험도 따랐다. 현장의 실정은 점심 한 끼 제공도 어려웠다. 학생들은 제 집 일처럼 열심히 해 주었다. 지친 학생들이 저녁 무렵에는 힘에 겨운지 드러눕는 아이도 나왔다. 정말 고된 일이었다. 일을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내 귀에 농부의 말이 걸렸다.
 “내일도 해 주었으면 좋을 텐데……”
야간 학생들과 찾아간 곳은 몽돌이 깔려 있는 해변이었다. 학교의 일정으로 체육대회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태풍 피해로 온 지역이 비상사태인데, 온전히 체육대회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취소하고 자원 봉사를 나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한번 다녀간 흔적이 보였다. 밀려온 쓰레기를 다 치우지 못하여 다시 우리가 투입된 것이다. 몽돌 위에는 많은 쓰레기가 소각된 흔적이 있었다. 여기 저기 널브러진 쓰레기는 아직도 산더미다. 생활 쓰레기까지 밀려온 바닷가. 그 속에는 무너진 양심의 쓰레기가 미아가 되어 뒹굴고 있었다. 우리는 그 미아를 치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촌옹(村翁) 한 분이 다가와 그 바닷가보다 농사짓는 밭이 더 급하지 않겠냐며 서운해 한다. 역시 그렇다. 나도 농사를 짓기에 그 심정 잘 안다. 촌옹의 밭은 몽돌밭 바로 위에 있었다. 다 지어 놓은 고구마 밭이 줄기는 없어지고 쓰레기 하치장이 되어 있었다. 학생들을 모아 그 쓰레기부터 치우게 했다. 분리 수거해서 처리토록 지시하니, 촌옹이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저 바닷가에 버리면 돼요.”
쓸쓸한 감정이 되어 집에 돌아오니, 아직도 전기는 들어오지 않는다. 단전 상태가 벌써 닷새째다. 냉장고의 음식은 모두 상했다. 아내가 신 김치로 찌개를 끓여 내놓았다. 허기져 말없이 먹고만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내는 한마디 한다.
 “아 글쎄, 외지에서 차가 와서 얼음을 팔았대요.”
 “초 한 자루에 천 오 백 원씩 판대요, 차로 싣고 와서.” 
힐끗 아내를 바라보는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웃에 사는 분이 찾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큼직한 냄비가 들려 있었다. 촛불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매우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애 아빠가 낚시한 거예요.”
  “그렇게 많이 잡았어요?”
  “네, 가두리가 터져서 고기가 많대요.”
그녀가 간 후 우리는 망연자실하여 한참을 그냥 서 있었다.
이번 태풍으로 우리는 근 일주일을 문명과 떨어져 살았다. 그 동안 잊고 지내던 우리의 순수한 삶을 맛보았다. 전기 없이 살았고, 전화 없이 살았고, 약수터에서 물을 길어 마셨고, 더 나아가 가족이 한 자리에 앉아 저녁 시간도 보냈고, 가족의 소중함도 새삼 느꼈다. 그러면서 또한 우리는 우리 인간의 일그러진 모습도 함께 보았다. 그 와중에 자신의 이기와 이득만을 챙기는 모습도 보았다.

가을 개화. 다른 해 같으면 잎이 곱게 물들어가야 할 시기에 꽃이 피었다. 그 꽃이 지면서 나무 가지에는 잎이 다시 돋아난다. 바로 잎이 져야 할 시기에 연초록의 새잎이 돋아나는 것은 신비스럽다. 전에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현상이다. 
벚, 앵두, 진달래. 이것들은 모두 잎이 나기 전에 꽃이 피는 것들이다. 태풍에게 모든 잎을 빼앗기고, 다시 잎을 만들어 걸칠 때에도 순서는 철저히 지키며 진행한다. 바로 가을이 코앞에 다가와 잎이 떨어져야 함을 알면서도 순서와 과정을 중시하는 나무의 삶의 태도에 저절로 옷깃이 여며진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도 어느 하나 거르지 않고, 질서를 찾아 변화해 가는 나무의 모습이 신비하다 못해 경건하다.
본래 잎이 피기 전에 꽃이 피는 나무들은 반드시 꽃을 피워야 잎이 돋는다는 사실이 이 오후에 무섭게 내 가슴으로 파고든다. 언제나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으로 살아왔던 지난 시간이 부끄럽고, 민망스럽다. 
모든 만물이 혼돈 속에서 질서를 다시 찾아가는데, 그 순간 우리들은 영악스럽게 제 몫을 찾으려 했고, 자신의 편리와 이익만을 추구한 것은 아닐까. 아무리 바빠도 순서를 찾아 서서히 움직이는 자연의 질서를 바라보면서 인간됨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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