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대학 강돈묵교수

한동안 백두사업 로비 사건이 화제로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군 고위 장성과 정치인들이 무기 중개상인 미모의 여인의 로비에 말려들었다는 것이다. 언론은 연일 이 사건의 심장에 화살촉을 쏘아대기에 여념에 없다. 아무개 장관이 여자 로비스트에게 연서를 보냈느니, 몇 번 만났느니, 호텔에 몇 번 갔느니 하며 야단이다. 심지어 그들이 주고받은 연서까지 지상에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의 사건을 다룸에 있어서 기본적인 원칙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사건을 로비 의혹 사건으로 보려면, 철저하게 로비로 한정하여 조사하고 수사해야 한다고 본다. 또 남녀의 사랑게임으로 보려면 철저하게 비밀이 보장되어야 옳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사생활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언론들은 사건은 로비 사건으로 보면서, 보도는 독자들의 구미에 맞게 사랑게임으로 몰고 간 듯한 인상을 주었다는 허물을 벗을 수가 없다.

로비(lobby)란 원외 활동을 의미한다. 본래 영국에서 로비란 ‘의사당의 원외자와의 회견실’이란 뜻으로 쓰이던 말인데 이것이 발전하여 ‘의원에게 공작하다’라는 뜻까지 가지게 되었다. 도 로비스트란 배후 압력단체로부터 보수를 받고 일을 하는 직업적인 진정인인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고, 그들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국민성 탓으로 이러한 활동에는 돈이 따르고, 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정당하게 활동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이해시키기보다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목표를 달성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로비라는 말만 나와도 알레르기를 일으키며 구린 곳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기 일쑤다.

물론 이번 백두사업에 어떤 구린 곳이 있는지 나는 전혀 알지 못한다. 또 그들을 두둔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다만 이들에게 왠지 모를 연민을 느낀다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군의 고위 장성이었던 아무개 장관은 어느 세대인가.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부를 위해 자신과 가정을 버리고 오로지 헌신했던 세대들이다. 물론 그들이 자신의 영욕을 멀리하고 국가의 발전에만 전념해 왔는지는 속단을 내릴 수 없다.

백두사업이 터지던 날, 나는 공교롭게도 김승옥의 소설「무진기행(霧津紀行)」을 읽고 있었다. 작가 김승옥과 아무개 장관은 같은 세대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어린 시절에 해방을 맞았고, 한국동란이라는 전쟁의 아픔을 뒤로 한 채 출세를 위해서는 자신의 뜻을 죽이고 오로지 순종만을 요구 당하던 세대들이다. 「무진기행」에 나오는 주인공 윤회중 역시 이들 세대들과 맥을 같이 한다. 자신의 뜻대로는 어느 것 하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주위의 요구에 순응만 일삼는 인물 말이다. 이런 피동적인 삶의 연속 중에 나타난 하인숙이라는 여인은 적어도 윤회중에게는 행운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윤회중은 그녀와 바로 깊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에게 능동적인 행동의 기회를 주지 않았으나, 하인숙에게서만은 그런 기회를 제공받게 된다.

여기에 나오는 윤회중과 백두사업에 연루된 아무개 장관과는 너무도 흡사하다. 아내의 편지를 받고 무진을 떠나가는 윤회중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편지 쓰기였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써놓은 편지를 읽고 또 읽고 끝내는 찢어버리고 만다. 아무개장관도 그랬을 것이다. 미모의 로비스트에게 많은 밤을 밝히며, 가슴을 쓸어내는 편지를 쓰고 또 쓰고 찢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윤회중과 하인숙의 사랑게임에 대하여는 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이 두 주인공이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서 어떻게 방황하고 그 굴레를 어떻게 벗어나는가를 눈여겨볼 뿐이다. 소설에서는 그토록 너그럽게 보면서도, 이번 사건에서는 로비 의혹의 족쇄를 채워 놓고, 침을 흘리며 사랑게임으로 인식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개인의 사생활은 보호되어야 한다. 설혹 그들이 미천한 직업에 종사하든 고위직에 종사하든 그것은 갈릴 바 아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스스로 행동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문제다. 어디까지나 여자 로비스트와 아무개 장관이 주고받은 러브레터는 개인의 사생활이다. 관중의 박수를 의식해서 외줄 타러 무대에 오른 배우를 임의로 떨어뜨릴 수는 없다. 언론이 독자의 알 권리 운운하며, 개인의 사적인 연서까지 공개하는 것은 합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연서의 내용은 결코 로비레터가 아니고, 러브레터인 것이다. 독자의 알 권리에 앞서 개인의 사생활이 보호되는 건전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백두사업 로비 의혹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 같은 현상이 우리 사회에는 얼마나 많을까 생각해 본다. 또한 로비레터는 공개해야 하겠지만, 러브레터는 공개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현대수필>, 2000.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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