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돈묵 거제대교수

지금도 비오는 거리에 나가 보면 동요가 걸어간다. 어린아이들의 동심이 걸어가고 있다. 그만큼 비가 오다는 것은 우리를 동심에 젖게 하고 순박하게 하며 무엇인가 모를 그리움에 싸여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갖게 한다.

아들의 건강한 웃음을 희구하며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고, 어린 시절 나에게 지대한 교훈을 주었던 은사님의 얼굴이 되살아나며, 염병(染病)으로 홀연히 내 곁에서 멀어져 간 여자 친구의 얼굴이 안개 저편에서 어른거린다.

동구 밖 냇가에서 물장구치던 추억이 그립고, 수숫대 꺾어 밀며 달리던 시골길이 그립고, 고구마 후벼 먹던 초가들의 배고픔이 그립다. 비오는 날은 이런 아린 추억들이 되살아나서 좋다. 전혀 삶의 때가 묻지 않고 순박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더욱 좋다.

그래도 비가 오는 날은 뭐니뭐니해도 우산을 쓰고 가던 추억이 제일 그립다. 어린 시절 우산을 쓰고 가면 왜 그리도 신바람이 났는지. 그때만 해도 우산이 귀해서 대부분의 어린아이들은 우비를 입거나 비료 부대를 뒤집어쓰고 다녔다. 다른 동무들의 선망의 대상인 우산을 쓰고 가는 우쭐함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비록 바람을 이기지 못하여 뒤집혀지는 지우산(紙雨傘)이라도 괜찮고, 누나가 쓰다가 두어 개 대오리가 부러진 우산이라도 신바람이 났다.

요즈음은 비오는 거리에 나가더라도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 재미가 없다. 우리의 살림이 넉넉해진 탓으로 어린 날의 낭만은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동요 속에 뛰어놀던 찢어진 우산이 없어져서 안쓰럽다. 좁다란 골목길에 찢어진 우산을 쓰고 다니던 우쭐함이 문득 그립다.

지우산이 나오고 비닐우산이 나오고, 이제는 웬만한 바람에도 견디어낼 수 있는 천으로 만든 우산이 나오면서 우산살 역시 대오리에서 쇠살로 바뀌었다. 그로 인해 지우산은 없어지고 비닐우산은 일회용으로 그 임무가 달라졌다.

느닷없이 소낙비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부담 없이 지폐 한 장을 꺼내어 비닐우산을 산다. 그리고 이것을 받쳐 들고 빗길을 걸어간다. 온전히 비를 가려주었으면 하는 기대감도 없다. 바람을 막아주려니 기대하지도 않는다. 쏟아지는 비로 하여 바지가 흠뻑 젖어도 우산에게 푸념을 늘어놓지 않는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뒤집히어 대오리가 부러져도 우산을 탓하지 않는다. 다만 우산을 받쳐 들고 있다는 데 흡족하고 얼굴로 파고드는 빗방울을 막아주면 다행으로 생각한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어느 누구 하나 비닐우산의 고마움을 말하지 않는다. 말없이 손에서 내려놓을 뿐이다. 정성을 다하여 접어두는 사람도 없고, 다음에 다시 사용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더러는 방문처에서 잊어버리고 나왔을 경우, 비가 아직 멎지 않았다 해도 다시 가지러 가는 법이 없다. 잊고 나왔구나, 하고 한 번쯤 되뇌이고는 다시 호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낸다.

우산을 쓰고 가다가, 문득 소낙비는 멎고 날이 개이면 부담 없이 길가 쓰레기통에 던지고 가는 우산이 바로 비닐우산이다. 비닐우산은 날이 갬과 동시에 필요 없는 물건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처절하게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비닐우산은 불평을 늘어놓는 경우가 없다. 오직 스쳐 지나가는 주인을 만나 그에게 정성을 다해 헌신하다가 이내 버려지더라도 묵묵히 버려질 뿐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에게는 최대한 관용과 사랑과 헌신을 제공하면서도 자신의 삶에는 철두철미하다. 어떠한 유혹과 괴로움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해도 자신을 통제하는 데는 게으름이 없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가 귀에 대고 다정하게 향기로운 밀어를 나누자 해도 대오리는 꿋꿋하게 대나무의 기질을 간직한 채 참아낸다. 들풀의 허리를 꺾어놓고 달려드는 폭풍이라 해도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피신하지 않는다. 오직 온몸에 생채기가 나서 생명이 다한다 해도 굴하지 않는다. 간사스런 사람이 비닐우산의 고통이 안쓰러워 접어버린다 해도 결코 만족해 않고 팔을 펴고자 온 힘을 다해 바람 속에서 푸드득거린다.

비닐우산인들 어찌 사랑을 받고 싶지 않겠는가. 비닐우산인들 어찌 베푼 헌신에 대한 보답을 받고 싶지 않겠는가. 많은 세월 지나면서 참고 인내하며 조약돌처럼 자신의 삶을 세파에 문질러 온 결과이리라. 조그마한 욕구에서부터 불타는 젊음까지도 모두 삶의 틈바구니에 집어넣어 갈고 닦은 결과이리라. 대개의 경우 자신의 욕구가 좌절에 직면할 때마다 체념하고 포기하기 마련인데 비닐우산은 그러지를 않는다. 오직 자신의 삶을 꿋꿋하게 걸어갈 뿐이다.

사람들에게서 온갖 사랑을 받으면서 지내던 옛날의 추억을 그리워하거나 눈물짓는 법도 없다. 이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체념하지도 않고, 사용되고 버려질 뿐이다. 사용하고 버리는 사람이나 사용되고 버려지는 물건 쪽에서나 상호 부담을 주지 않는 관계가 사람과 비닐우산의 관계다.

나는 비닐우산이고 싶다. 아무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는 일회용 비닐우산이고 싶다. 그리고 찢어진 나를 받쳐 들고 어린아이들이 동요를 부르면서 좁다란 골목길을 걸어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이런 나의 욕구가 헛된 것임을 잘 안다. 비닐우산은 이런 것마저도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수필>, 1992.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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