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돈묵 거제대교수

나는 술을 즐기는 편이다. 즐긴다기보다는 사랑하는 편이다. 어찌 보면 세상에 나만큼 술을 사랑하는 사람도 드물지 싶다. 다른 사람들은 벗들과 앉아서 한담을 나누거나 서로 뒤틀린 심사를 풀기 위해 술의 도움을 청하지만, 나는 그러는 법이 없다. 오직 사랑할 뿐이지, 그를 이용해 다른 짓을 하지 않는다. 물론 전에는 나도 그랬다. 여럿이 둘러앉아 마셔댔다.

요즈음은 특별한 모임이 아니면 언제나 나는 술과 단 둘이 마주앉는다. 이제는 떠들썩한 자리에서 술친구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술이 아니다. 조용하게 주방에서 혼자 앉아 술과 마주하고 한가한 시간을 즐긴다.

  나는 그 많은 술중에서도 유독 소주만 사랑한다. 전에는 나도 술에 대해 가리지 않았다. 맥주가 되었든 양주가 되었든 가리지 않고 가까이 했다. 비록 체구는 작아도 밑 빠진 독이란 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셔댔다. 어쩌면 그 당시에는 술의 참맛을 모르고, 날뛴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주(酒)’자만 들어가면 다 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술병에 술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로 알았다. 비록 도수가 높은 양주라 해도 마개를 딴 자리에서 바닥을 보아야 했다.

  그러던 것이 어느 한 순간부터 소주만 즐기게 되었다. 아마 세상을 알아가면서부터 그리 된 것 같다. 여럿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호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감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른다. 갖가지 특성을 가진 것들이 한곳에 모여서 지지고 볶고 싸우면 결국 피곤한 것은 누구이겠는가. 이제는 여러 맛을 보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진정한 술의 맛 하나를 즐기기로 했다고 하면 지나친 사치일까. 여하튼 그토록 즐기던 양주도 입에 대지 않고, 우리의 전통 막걸리도 욕심이 없다. 아무런 색깔도 없어 맹물 같아 보이지만, 담박한 술의 맛을 짙게 풍기는 소주로 내 술사랑은 모아지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소주를 입에 댈 수 없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횟집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주문한 술병의 마개를 열자 거기에 붉은 녹이 묻어 있었다.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지만, 뭐 어떠랴 한 것이 그만 탈이 나고 말았다. 밤을 지새우며 구토를 한 나는 그 이후 소주의 냄새만 맡아도 견디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속에서부터 메스껍게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고통이었다.

  결국 술을 멀리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다른 술은 이미 내게서 멀어진 지 오래 되었고, 단 하나 즐기던 소주마저 멀찌감치 밀어내야 할 판이었다. 한 동안 술과 소원하게 지낸 후 지난번에 탈을 낸 술이 아닌 다른 회사의 소주를 입에 대어 보았다. 상당한 모험이었다. 그런데 의외였다. 그것은 괜찮았다. 그 이후 나는 술집에 가면 소주의 상표를 지목해 주문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마 주인들은 나를 소주 회사의 직원쯤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품세로 보나 하는 짓거리로 보나, 어디 임원인들 되겠는가. 제 회사 제품 홍보에 나선 말단의 처참한 음주 책임자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한번은 술을 마시다 보니 술병이 뒤섞였는지, 내가 그토록 피하던 회사의 것이 빈 병들 속에 들어 있었다. 내 속에서 그 소주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전갈이 아닌가. 나는 이 무슨 경사스러운 일이냐며 내친 김에 그 술을 한 병 더 청해 마셨다. 이후로 나는 어떤 소주든 가리지 않고 마실 수 있는 허가증을 받은 꼴이 되었다.
  이제 나는 소주 한 가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리 귀한 양주라 해도 입에 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더러 귀한 술이 내 손에 들어와도 즐거워하지 않는다. 다른 이가 그것을 보고 욕심을 내면 선뜻 내주기도 한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소주만도 못한 것이니까.

  그런데 술좌석이 집안으로 들어온 데는 딱히 이유가 없다. 어느 날 문득 생각하니, 술을 집에서만 마시고 있었다. 더러 모임이 있어 밖에서 반주로 한두 잔 하는 거야 인사치레지만, 술에 취했다 할 정도로 마시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술과 벗하고 앉아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순전히 나이 탓이다.

  대개 집에 있는 마누라가 예쁘면 함께 할 요량으로 그럴 경우도 혹 있을지 모르나, 나의 경우는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아내는 밀밭 옆만 지나가도 얼굴이 벌게지기 때문이다. 지친 남편의 심사를 달래주기 위해 마지못해 한 잔 받는 시늉이라도 할 법한데, 아무리 권해도 옆에서 같이 홀짝거리는 법이 없다. 그보다 아예 내가 권하지 않는다는 쪽이 옳다. 한 모금 마시고 난 뒤에 벌어질 사태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집안을 다 쓸고 다니며 역겨워 할 모습을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소주와 단 둘이 마주한다. 그것도 한 잔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한두 병은 마개를 따야 겨우 기별이 오니, 사랑치고는 깊은 사랑이다. 옆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소주만 놓고 앉아서 홀짝거리는 내 모습. 그렇다고 특별난 안주를 장만하는 것도 아니고, 냉장고 문 열어 손에 잡히는 것이면 족하다. 김치 쪼가리도 좋고, 배추 뿌리도 좋다. 중요한 것은 소주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소주는 내 사랑을 알기나 할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저 하나만을 귀여워해 주고 사랑하였더니, 더러는 내 정신을 몽롱하게 흐려 놓는다. 나만큼 소주를 사랑한 친구가 없다고 말했으니, 금시 말을 바꿀 수도 없고 난처한 꼴이 되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대처하는 수밖에 없겠다. 하나, 눈치 빠른 녀석이 벌써 내 속을 먼저 꿰뚫고 있다. 전에는 전혀 없던 일이 자주 일어난다. 세상의 이치가 다 그런가 보다. 귀여워해 주면 믿고 더 앙탈을 부리는 계집 옆을 지키는 것이 술이고 보면 배운 성도 싶다. 문득 소주의 애교에 더 이상 넘어가서는 아니 되겠다고 다짐도 해 본다. 더 이상 이것의 교태에 무너지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닐 것 같은 판단이 서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다짐을 해도 어느새 내 입으로 소주잔이 다가가고 있다.

편집부  news@geojejournal.co.kr

<저작권자 © 정의로운 신문 거제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