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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보] 근세 거제를 빛낸 인물...양달석·하동주·유치진·유치환·김기호·김기용능곡 이성보 / 거제자연예술랜드 대표·시조시인
거제저널 | 승인 2023.08.04 12:42

택리지(擇里志)란 책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300여 년 전인 조선 영조 초기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이 저술한 지리서(地理書)입니다.

이 책에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서는 人物이 많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풍광이 빼어난 우리 거제에서는 걸출한 人物들이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사곡삼거리 버스 정류장 뒷편에 화비(畫碑)가 하나 서 있습니다.

2002년 대한민국을 빛낸 50인에 선정된 화가를 기리기 위하여 국비로 세워진 비석입니다. 이 화비의 주인공은 우리 거제 출신 여산 양달석((黎山 梁達錫, 1908~1984) 화백입니다.

여산의 작품은 자신의 외롭고 불우하였던 소년 시절을 동심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듯이 시골의 자연환경과 농촌 생활의 서정을 동화처럼 정겹고 평화롭게 전개시키는 독특한 세계로 일관하였습니다.

화면에서는 소년, 소녀, 아낙네와 풀밭, 소 등이 등장하여 표현 기법이 매우 동심적이어서 ‘동심의 화가'로 불렸습니다.

1962년 제1회 경남문화상 수상자인 여산 화백은 1974년부터 화단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국전 추천 작가, 초대 작가로 출품하였습니다.

그는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등과 함께 1세대 서양화가로 오직 그림만 그리다 삶을 마감한 '천재 화가'였습니다. 여산의 작품은 2600여점에 이르고 있습니다.

선생의 향리인 사등면 성내리에 양달석미술관이 조촐하게 개관되었습니다. 앞으로 번창과 발전을 기대해마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여산 선생의 일화를 하나 소개해 두고자 합니다. 여산 선생께서 미술동맹단체를 만들어 빨갱이 단체에 가입했다는 누명으로 경찰에 잡혀가서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때 "나의 오른손은 때리지마라, 후일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고집한 일화는 1974년4월21일 부산에서 발행되는 신문에 게재된 바 있습니다.

여산의 화비와 나란히 묵적비(墨積碑)가 하나 서 있습니다.

추사체의 맥을 이은 전통 서예가로 특히 추사체의 행서(行書)에서 일가를 이루어 추사체 특유의 강직함을 잘 살려 괴귀가 감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州, 1869~1944) 명필의 묵적비 입니다.

성파는 서예사에 있어서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서법인 추사체의 맥을 잇게한 서예가로 후세에 추사체 행서의 모범을 보인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습니다.

5척 단구에 음성이 쩌렁쩌렁하고 괴팍한 성질에 고집스러운 인물인 성파는 통도사, 고성 옥천사 <백련암>, 범어사 <종루>, 통영 용화사 <용화전>, 밀양 <영남루>와 <아랑사>의 현판을 모두 휘호하였습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아깝다. 추사가 성파 먼저 태어났다니. 만약 성파가 추사 먼저 태어났으면 추사체가 아닌 성파체가 되었으련만.”

성파는 이곳 거제면 동상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산방산(山芳山)은 우리 거제의 명산으로 文筆峯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산방산은 거제면과 둔덕면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거제면은 문필봉의 ’筆‘에 해당하고 둔덕면은 '文'에 해당한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제면에서는 성파 하동주 선생을 비롯한 뛰어난 서예가들이 태어났고, 둔덕면에서는 극작가 동랑 유치진, 시인 청마 유치환 등 불세출의 문인을 배출하였습니다. 

특히 거제만의 바닷물을 두고 먹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셰익스피어란 별칭을 갖고 있는 동랑 유치진(東朗 柳致眞, 1905.11.19.~ 1974.2.10) 선생은 둔덕면 방하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민족은 본시 가무문화(歌舞文化)를 유독 사랑해온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창조자들이라고 할 예능인인 광대, 악공, 기녀 등을 천민시해 왔습니다

유치진 평전을 쓴 유민영 교수는 동랑을 가리켜 '전무후무 할 정도의 독보적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 이유인즉 '예술가가 평생 한 분야에서 성취해 내기도 힘든데 그는 문화 계몽운동가로 시작하여 극작․시나리오작가, 연출가, 연극·영화이론가, 극장 건축가 그리고 예술교육자로서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방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보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동랑을 두고 '한국 연극의 아버지'라 칭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국민 수준과 문화에 대한 평가는 그 나라의 국립극장과 화훼 전시장에 가보면 안다고 하지 않는가요. 동랑이 설립한 ‘드라마 센터’, 이 하나만 가지고도 동랑의 친일문제는 사면되고 남음이 있다고 저는 여깁니다.

청마 유치환(靑馬 柳致環, 1908.7.14.(음)-1967.2.13) 선생은 동랑 유치진 선생의 동생분입니다. 청마 선생은 詩보다 인간을 더 소중히 여겼고 항상 가진 자보다 가지지 못한지를 더 사랑했습니다. 시집이 출간될 때마다 부끄러워하였고 바닷가 한 구석에서 고기 잡는 이의 삶을 부러워 한 겸손한 시인이었습니다

청마는 대일 저항기의 비극적 역사 속에서 출발해, 8·15광복, 6.25 전쟁, 자유당 정권, 4.19에 이르기까지 불굴의 의지로 조국과 겨레를 위한 뜨거운 노래와 저항 정신으로 민족혼을 안고, 때로는 좌절과 탄식의 몸부림으로부터 자신과 겨례를 위한 무서운 채찍과 자학으로, 한편으로는 생계의 위협을 무릅쓰고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에 항거하고, 전란의 극한적 상황에 스스로 종군을 지원해 전쟁의 비극을 노래한 애국시인이었습니다.

1946년 해방된 이듬해 우리 국민들이 양춘의 따뜻한 햇빛을 입고 뒷동산에서 나무 심는 것을 보고 그 유명한 '식목제'라는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어머니의 묘소 앞에 서면 사모비에 당신곁에 당신 모셔 당신 묘에 묻히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졌습니다.

거제시에서는 1997년 4월 한식일을 기하여 양산 백운공원묘원에 안장된 청마의 묘소를 부모님이 잠들어 있는 둔덕의 지전당골로 이장하였고, 청마기념관을 건립해 청마의 문학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미당(未堂)을 명장이라 한다면, 청마를 거장이라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는 청마의 웅혼한 시풍을 기려 하는 말이라 하겠습니다. 경향 각지에 청마의 시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습니까.

청미기념사업회는 해마다 9월에 둔덕골에서 청마문학제를 열어 거제를 대표하는 축제가 되게 하였습니다.

저 유명한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는 그의 대표적 작품입니다. 田園將蕪胡不歸(전원장무호불귀,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 시구에서 무원(蕪園)을 취하여 자신의 아호로 삼은 이가 있습니다. 바로 무원 김기호(蕪園 金琪鎬, 1912.9.10-1978.12.4) 선생입니다.

무원 선생은 1951년과 1953년에 하청중고등학교를 창설하셨습니다. 뒷날 하청고등학교는 경남산업고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습니다. 무원 선생은 하청면 사환마을 출신이며, 무원(蕪園)은 황무지를 뜻합니다. 일제강점기, 6.25전쟁, 보릿고개를 거친 거제의 실상은 그야말로 황무지나 진배 없었습니다.

당시 거제의 교육 환경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장승포와 옥포, 일운면의 학생들은 부산 유학의 길을 텄고, 고현은 마산으로, 둔덕과 사등은 통영으로 유학했습니다. 그 유학은 있는집 자식들의 일이었습니다.

무원선생이 창설한 중고등학교는 연초, 하청, 장목 지역의 학생들에게는 유일한 면학의 길이었습니다. 한때 거제군 시절 거제군청 과장급 이상 공무원의 60%가 하청 중·고등학교 출신이었다면 다한 말입니다.

무원 선생은 그 사립학교를 국가에 무상으로 헌납했습니다. 그는 1965년 페스탈로찌 상이라 일컫는 제1회 경향교육상을 수상했습니다. 195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靑山曲」이 당선되었습니다. 시조시인으로 성가를 높인 무원선생의 대표작은 ‘풍란’입니다.

1.

하오리 잦은 머리 위태로운 벼랑 위에

한사코 뻗는 손길 허위적이 서렸어도

허허히 떠도는 구름 이 하늘이 섦구나.

2.

어느 먼 여울가에 타버린 노을인데

星河 아득히 푸른 彼岸 그 너머로-

상머리 호젓한 꿈길엔 이끼만이 차거워라.

3.

흙내음 가시어진 절처에 도사리고

두어 치 매운 몸매 망울진 사랑이여

匕首날 푸른 서슬은 안을 向한 다스림.

4.

땅에 금을 그어 짓궂은 새움이나

무성한 烟月 위에 우쭐대는 수목이야

차라리 슬픈 응시로 이 자리를 지켜라.

-‘풍란’, 전문.

무원 선생은 ‘풍란’이라 제목을 붙인 단 한권의 시조집을 남겼습니다.

어디선가 거제의 노래가 들리는 듯 합니다.

섬은 섬을 돌아 연연 칠백리

구비구비 스며 배인 충무공 그 자취

반역의 무리에서 지켜온 강토

에야 디야 우리 거제 영광의 고장.

‘거제의 노래’도 무원 선생이 작사했습니다. 오늘날 선생은 있어도 스승은 없다는 말을 합니다만, 이 말도 무원 선생 앞에서는 빈말이 됩니다.

그것뿐입니까. 해금강이라는 자필 시를 이곳에 담아 두고자 합니다. 너무도 훌륭하고 아름다운 글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사곡 삼거리에서 고현시외버스터미널에 이르는 대로변에 언덕 ‘坡’자를 아호로 쓰는 두분의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한분은 앞에서 언급한 성파 하동주(星坡 河東州) 선생의 묵적비고, 또 한분은 향파 김기용(香坡 金琪容, 1915.4.20.-1988.11.16) 선생의 애란비(愛蘭碑)입니다. 이 두 기념비를 많은 거제시민들이 잘 모르지 기념비를싶습니다.

향파 선생은 무원 선생의 실제(實弟)입니다. 선생은 난인(蘭人)이셨습니다, 현재 전국 150만명을 헤아리는 애란인들 중 사표(師表)로 모시는 이는 향파 선생이 유일합니다.

‘애란은 애국에 통한다’고 하신 향파 선생께선 1981년 난 재배 이론서인 <동양란 재배와 감상>을 저술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약 5백년 전에 강희안이 난 재배 이론이 간략히 언급된 <양화소록>을 남겼을 뿐으로 난에 관한 이렇다할 자료가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저술한 것입니다.

서울농대 화훼과 교수가 저술해야 할 난재배이론서를 김해농업고등학교 출신 거제 농부가 펴냈으니, 그 책이 한국 난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중판을 거듭한 것으로 입증되고 있습니다.

제주한란에 관해 독보적이셨던 향파선생, 제주한란을 천년기념물이 되도록 하신 분은 제주 사람이 아닌 거제 사람 향파 김기용 선생입니다. 당시 향파 선생은 78차례나 한라산을 올랐다고 합니다. 오로지 제주 한란을 개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난 사랑을 혼자만의 사랑으로 간직하지 않고 난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난회(蘭會)를 조직하고 강연회를 열고 난 배양 기술을 전수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난을 위해 태어나셨다는 평가를 받는 향파 선생은 옷 차림이 너무 검소하여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시골 농부로 보였습니다.

춘란과 제주한란의 여러 품종들을 명명하셨고, 한국 난계에 큰 족적을 남긴 향파 선생이셨기에 전국의 애란 단체와 애란인들의 성금으로 <향파 김기용 애란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여산 양달석, 성파 하동주, 동랑 유치진, 청마 유치환, 무원 김기호, 향파 김기용 이상 여섯분의 면면을 살펴보아도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 지론이 공감받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거제저널  gjjn322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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