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A(여)씨는 1년 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거제로 이사 왔다. 태어나 한번도 떠나본 적 없는 서울 생활을 훌훌 털고 아들과 함께 따뜻한 남쪽 바다의 정취가 스며 있는 거제시 외곽에 정착했다. 

다행히 그 즈음 늘 동경하던 바다 조망이 탁 트인 한 까페에 일자리도 구했다. 비록 수입은 변변치 않지만, 일하는 틈틈이 볼 수 있는 푸르른 바다는 쌓였던 일상의 묵은 스트레스를 말끔히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런 소소한 행복에 익숙해질 무렵, 까페에 손님으로 오던 깔끔한 50대 손님을 만났다. 일주일에 4~5회씩 까페를 찾던 그는 모 플랫폼업체 임원이라고 소개하며 언제나 깍듯한 예의와 반듯한 몸가짐으로 눈길을 끌었다. 

그는 늘 명품을 차려입고 외제승용차나 국산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가끔씩 회사 임원회의를 한답시고 까페에 4~5명의 남성들과 하루종일 머물다 가곤 할 정도였다.

자연스레 A씨도 친절하고 예의바른 남성을 매너있는 손님으로 대하고 종종 가벼운 대화도 오갔다. 까페 70대 여사장에게도 그는 어느 새 친숙하고 반가운 손님이 돼 있었다. 

그러던 지난 10월 A씨는 거제로 오면서 가져 온 소형승용차가 말썽을 자주 부려 차를 바꿔야 겠다는 생각끝에 그와 자연스런 대화가 오갔다. 그는 A씨에게 "걱정마라, 내가 그 분야를 잘알고 있다, 아주 싼 가격에 고급차를 구해주겠다"고 그럴싸한 제안을 했다.

A씨와 여사장에게 그는 "국산 고급승용차나 외제차를 경매물건으로 들어가기 전에 뒤로 나오는 것을 얼마든지 싸게 확보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A씨는 솔깃했다. 까페 여사장도 그의 제안에 선뜻 응했다. 며칠 후 금융계좌로 A씨는 1000만원, 여사장은 2500만원을 각각 보냈다.

그런데 돈을 보내고 나니 고급승용차를 그 정도 헐값에 구입한다는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A씨는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꼭 뭐가 씌인 것 같았어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덜컥 돈을 보냈으니...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이가 없어요"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거제경찰서에서  지난달 26일 50대 남성을 구속 송치한 사건이 검찰에 접수됐다는 문자 통보>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A씨 등은 그때부터 아예 까페에 발길을 끊은 그와 전화로 숱한 입씨름을 이어갔다.

남성은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했다. 그러나 A씨 등은 그가 차를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해놓고 고소 얘기를 하니 합의 운운하며 돈을 돌려 주겠다는 말에서 사기꾼이라는 걸 더욱 확신했다.

며칠 후 A씨 등은 거제경찰서에 사기 혐의로 그를 고소했다. 수사가 진행중인 가운데 A씨 등은 돈을 돌려받기 위해 그 남성을 상대로 온갖 설득과 협박(?)을 벌이며 애를 태워야 했다.

오랜 실랑이 끝에 여사장은 2000만 원을, A씨는 200만원을 어렵사리 돌려받는데 성공했다. 남은 피해금은 두사람을 합쳐 1300만원 가량. 그다지 크지 않은 금액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남성이 덜컥 경찰에 구속됐다. 지난 달 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구속만 안되면 어떻게든 돈을 꼭 갚겠다"고 판사에게 읍소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부산에 주소를 둔 해당 남성은 사기죄로 누범 기간중이었다. 형법 제 35조1항에는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아 그 집행이 종료되거나 면제된 후 3년 이내에 금고 이상에 해당하는 죄를 지은 사람은 누범(累犯)으로 처벌한다'고 돼 있다. 누범의 형은 그 죄에 대해 정한 형의 장기의 2배까지 가중 처벌한다.

사기죄의 일반 형량이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 벌금에 해당되므로, 향후 예상되는 그의 죄값이 대충 가늠이 된다.

근 1년의 기간을 아주 매너있는 손님으로 이른바 '물 좋은' 까페를 드나들며 친분을 쌓아왔던 그가 정작 노린 게 무엇이었는지 답이 나왔다.

A씨는 알고보니 그에게 비슷한 수법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이 지역에 여럿 있었다. 일부 피해자는 "그가 돈을 곧 돌려준다고 했는데...구속되면 안되는데..."라며 아직도 해당 남성이 둘러댄 거짓말을 믿는 듯한 원망도 돌아왔다.

거제저널 취재결과, 그는 거제경찰서는 물론, 다른 경찰서에서도 비슷한 수법의 사기 사건이 몇 건 진행중인 사실이 확인됐다.

결국 용의주도(用意周到)했던 사기 행각은 그의 전력을 잘아는 경찰의 주도면밀(周到綿密)한 수사 앞에 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인 사기 사건은 대개 피해자와의 신뢰와 친분이 범행의 바탕이 된다. 수사관들은 이를 두고 '사기 피해금액은 신뢰기간에 비례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A씨는 "머리도 식히고 조용하게 살려고 거제에 왔는데...제겐 800만원이란 큰 돈을 어쩌구니 없이 사기 당하니 요즘 머리도 무겁고 우울증이 온 것 같다"면서 "다시는 우리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거제저널에 제보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A씨는 "사기를 당하는 건 진짜 한순간"이라며 "엊그제 새해 일출을 보면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정신 바짝차리지 않으면 또 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경각심을 다시금 되새겼다"고 덧붙였다. 

거제경찰서 수사과는 50대 해당 남성을 지난달 22일 통영지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거쳐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지난달 26일 검찰(통영지청)에 송치된 그는 현재 통영구치소에 수감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한편 최근 거제지역에서는 수십억~수백억원대 가상자산 콕(KOK) 투자 사기 피해 사건이 입소문을 타고 있다. 콕 토큰은 2019년 9월께 발행된 가상자산이다.

발행사측은 300달러 이상 예치를 미끼로 4~20% 수익이 발생하는 콕 토큰 채굴권을 주겠다고 광고해 다단계 방식으로 돈을 끌어 모았다.

현재 경찰은 국내 피해자는 90만 명, 피해 규모는 4조원대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미·영 당국에 피해 고발이 쇄도해 수사 착수를 검토중인 것으로 보도됐다.

이 사건에는 거제지역 전 정치인이나 그 지인들이 다단계 방식으로 줄줄이 연루돼 피해를 입었다. 피해자들이 자체 파악한 지역의 피해 규모만해도 300억원 안팎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전 재산은 물론,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팔거나 노후자금까지 털어 투자했으나 지난해 5월부터 콕 토큰이 0.006 달러대로 폭락하면서 사단이 났다.

게다가 발행사측이 거액의 투자금을 빼돌렸다는 소문까지 더해지면서 투자금을 회수할 가능성이 어렵게 됐다. 이 때문에 지난해부터 거제지역 피해자들은 주말마다 서울 항의 집회에 참석하는 등 파장이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은 오는 5일 밤 KBS 추적60분 프로그램을 통해 사건 전모가 보도될 예정으로 있어 방송 내용에 관심이 쏠린다. <14:34 수정→'한편' 기사 일부 보강>  

서영천 대표기자  gjjn32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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