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자화상 속 힘찬 미소

수상 소식을 듣기 바로 전, 저는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는 박사논문에 지쳐,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그리겠다는 뚜렷한 목표는 없었는데, 그리다보니 약간 우울한 자화상이 그럭저럭 완성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문장을 쓰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제 손은 자주 자판 앞에서 머뭇거렸고, 그만큼 자주 길을 잃었습니다. 이 길이 제가 가야할 길이 맞는지, 제게 이 길을 갈 능력이 있는지, 과연 논문을 완성할 수는 있을지 자꾸 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물으면서도 계속 작품을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울한 자화상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석사논문을 쓸 때도 저는 논문이 막히거나,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앞이 보였습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어도 끝이 보이기에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습니다. 제 석사논문은 유치환 시에 나타난 수직적 상상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치환 시에는 작고 정교하고 아름다운 것보다는 크고 거칠고 숭고한 것이 가득했습니다. 그런 것이 수직적 상상력으로 발현되어 웅장하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유치환의 전체 시를 읽고 제 나름대로 논리를 세워 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난 후, 한국 시사에 드문 유치환 아포리즘에 대해 좀더 세밀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게 이번에 수상하게 된 <유치환 시에 나타난 아포리즘 연구>입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유치환은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히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인입니다. 그는 존재론적이고 근원적인 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었고, 허무 앞에 절망하면서도 능동적인 허무에의 의지로 전환해 내는 강인함을 시, 때로는 아포리즘이란 형식을 통해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유치환의 말처럼 “문학이란 언제나 높은 윤리의 태반을 갖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는 윤리의식과 결부되는 듯합니다.

이렇게 훌륭한 시인을 기리는 청마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어 정말, 매우 기쁩니다. 그래서일까요. 수상소식을 듣고 난 후, 그리던 그림에 다시 몇 번 손길이 더하자, 제 우울한 자화상은 미묘하게 바뀌었습니다. 입매 어디선가 힘찬 미소가 느껴집니다. 터덜터덜 힘겹게 한걸음을 내딛고 다시 반걸음 혹은 두 걸음 되돌아가던 제가 좀더 힘차게 반걸음씩이라도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부족하고 미숙한 논문을 읽어주시고 평해 주신 김윤식 선생님, 박철석 선생님, 남송우 선생님, 세 심사위원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함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꾸준히 연구함으로써, 훌륭한 논문으로 보답하겠습니다.